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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등장인물 감상평

행복한삶누리기 2025. 7. 9. 12:12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은 작가 자신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 특히 드레스덴 폭격의 끔찍한 기억을 바탕으로 쓰인,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걸작입니다. 이 소설은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겪는 파편적인 삶의 조각들을 따라갑니다. 보니것은 이 비선형적인 서사와 블랙 유머, 그리고 공상 과학이라는 독특한 장치를 통해,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부조리함과 그로 인한 개인의 깊은 트라우마를 그 어떤 사실적인 소설보다도 효과적으로 그려냅니다.

등장인물

  • 빌리 필그림 (Billy Pilgrim): 이 소설의 주인공. 온화하고 수동적인 성격의 안경사.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폭격을 겪은 후,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여러 순간들 – 유년기, 전쟁, 전후의 평범한 삶, 그리고 외계 행성 트랄파마도어에서의 동물원 전시 생활 – 을 무작위로 오가며 살아갑니다. 그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해 파편화된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 커트 보니것 (Kurt Vonnegut): 작가 자신. 소설의 1장과 마지막 장에 직접 등장하여, 이 책이 드레스덴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담으려는 시도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야기에 개입하며, 끔찍한 사건을 언어로 재현하는 것의 어려움과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메타픽션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 트랄파마도어인 (The Tralfamadorians): 빌리를 납치하여 자신들의 행성에 있는 동물원에 전시하는 외계인. 그들은 화장실 변기 압축기처럼 생겼으며, 시간을 인간처럼 선형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모든 순간을 동시에 봅니다. 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모두 존재하며, 자유의지란 환상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포함한 모든 불행한 순간에 대해, 그들은 그저 "So it goes(그런 거지 뭐)"라고 말할 뿐입니다.
  • 킬고어 트라우트 (Kilgore Trout): 수많은 공상 과학 소설을 썼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 작가. 빌리는 그의 소설들을 탐독하며, 그의 기이한 이야기들은 종종 빌리 자신의 경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 에드거 더비 (Edgar Derby): 빌리와 함께 포로 생활을 하는 점잖은 중년의 고등학교 교사. 그는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대재앙에서 살아남았지만, 폐허 속에서 찻주전자 하나를 훔쳤다는 사소한 죄목으로 총살당합니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전쟁의 무의미함과 부조리함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줄거리

소설은 작가 보니것이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책을 쓰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1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주인공 빌리 필그림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의 삶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빌리는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순간들을 무작위로 넘나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벌지 전투에 어리바리한 미군 병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자신을 본다. 그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이송되어, '제5도살장(Schlachthof-fünf)'이라 불리는 지하 도축장에 수용된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13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는 대참사를 겪으며 살아남는다.

또한 그는 전쟁 후의 평범한 삶을 본다. 성공한 안경사가 되고,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는 외계 행성 트랄파마도어에 납치되어 할리우드 여배우와 함께 동물원에 전시되는 자신을 본다. 그곳에서 그는 시간과 운명에 대한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철학을 배우게 된다.

이 파편화된 시간 여행들은 "So it goes(그런 거지 뭐)"라는 문장으로 연결된다. 빌리(그리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그것이 사람이든, 샴페인 병이든 상관없이 이 문장을 담담하게 덧붙인다. 소설은 거대한 클라이맥스 대신, 폭격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에서 빌리가 살아남아, 새 한 마리가 "Poo-tee-weet?"하고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조용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감상평

'제5도살장'은 전통적인 전쟁 소설의 문법을 거부함으로써 전쟁의 본질을 더욱 깊이 파고든 반전 소설이다. 보니것은 전쟁이란 영웅적인 서사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비논리적이며, 개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는 부조리한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서사를 파편화한다.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끔찍한 사건은 너무나 거대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SF와 블랙 유머라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간신히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중심에는 '자유의지 대 운명론'이라는 철학적 질문이 놓여있다. 모든 순간이 이미 존재하며 바꿀 수 없다는 트랄파마도어인들의 운명론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빌리에게 일종의 위안이 된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저 "So it goes(그런 거지 뭐)"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니것은 이 철학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과연 현명한 위안인가, 아니면 위험한 도덕적 책임의 포기인가?

또한 보니것은 기억과 서사의 불완전성을 폭로한다. 그는 시간을 뒤섞고 자신을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트라우마 이후의 기억이란 결코 선형적일 수 없으며, 혼란스러운 사건에 대해 질서정연한 이야기를 만들려는 시도 자체가 거짓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파편화된 구조는 곧 트라우마를 겪은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5도살장'은 전쟁 서사에 대한 혁명적인 시도이자, 한 개인의 깊은 슬픔이 담긴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과 역사, 공상 과학을 뒤섞어, 트라우마와 생존에 대한 독특하고 잊을 수 없는 초상을 그려낸다. 보니것은 영광이나 영웅담 같은 거창한 메시지 대신, 파괴의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새의 의미 없는 지저귐과, 모든 죽음 뒤에 따라붙는 "So it goes"라는 체념 어린 속삭임을 남긴다. 이를 통해 그는 대학살에 대해 우리가 과연 무어라 말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 가장 정직하고도 강력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