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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 등장인물 감상평

행복한삶누리기 2025. 7. 16. 20:02

1920년대 초에 쓰였으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6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던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Мы)'은,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사상적 아버지로 불리는, 놀랍도록 선구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이성과 수학적 논리 위에 세워진 완벽한 미래 통제 사회 '단일 국가'를 배경으로, 체제의 충실한 부품이었던 한 남성이 '영혼'이라는 병을 앓게 되면서 겪는 혼란과 저항을 그립니다. 자먀찐은 이 소설을 통해, 집단의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이 어떻게 말살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며, 이후 모든 디스토피아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와 장치들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등장인물

  • D-503: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 그는 단일 국가의 위대함을 다른 행성에 전파할 우주선 '인테그랄'호의 설계자이자 뛰어난 수학자입니다. 그는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행복을 우선하는 단일 국가의 이념을 진심으로 신봉하는, 완벽하게 순응적인 시민입니다. 그러나 그는 금지된 감정인 사랑과 질투를 겪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균열을 느끼고 끔찍한 혼란에 빠집니다.
  • I-330: 신비롭고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저항적인 여성. 그녀는 단일 국가에서 불법인 흡연과 음주를 즐기며, 체제를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녀는 D-503을 유혹하여 그에게 열정과 자유, 그리고 상상력의 세계를 알려주며, '메피(MEPHI)'라는 지하 저항 조직으로 이끕니다.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의 영혼과 반항 정신을 상징합니다.
  • O-90: D-503에게 성(性) 파트너로 배정된 여성. 그녀는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원초적인 모성애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욕망은 이성적이지는 않지만, 단일 국가의 규칙에 저항하는 또 다른 형태의 본능적인 반란을 보여줍니다.
  • 은혜로운 분 (The Benefactor): 단일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 매년 만장일치로 재선출되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자유가 곧 인간 불행의 근원이라고 믿으며, 자유를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완벽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그는 '멋진 신세계'의 무스타파 몬드나 '1984'의 빅 브라더의 원형이 되는 인물입니다.

줄거리

이야기는 미래의 유리 도시, '단일 국가'의 시민인 D-503이 쓰는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사회에서 개인('나')은 소멸하고 오직 집단('우리')만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고, 모든 생활이 '시간표'에 따라 엄격하게 통제되며, 투명한 유리벽으로 된 집에서 서로를 감시하며 살아간다.

체제의 충실한 신봉자인 D-503은, 단일 국가의 위대함을 기록하여 우주선 '인테그랄'호에 실어 보내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저항적인 여성 I-330을 만나면서 그의 완벽하고 논리적인 세계는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에게 사랑, 질투, 그리고 그가 '영혼'이라고 진단하는 정체불명의 '병'을 앓게 만든다.

I-330을 통해 그는 과거의 혼란스러운 유물들이 보존된 '고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도시를 둘러싼 '녹색의 벽' 너머에 야생의 자연과 저항 세력 '메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의 '병'이 깊어질수록 D-503의 일기는 점점 더 혼란스럽고 절박해진다. 그는 단일 국가에 대한 길들여진 충성심과, I-330을 향한 새로운 열정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긴다. 결국 그는 '메피'가 계획한, 인테그랄호의 첫 비행을 탈취하려는 혁명 계획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저항 세력은 진압된다. 단일 국가는 모든 시민에게 '상상력'을 외과적으로 제거하여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는 '대전환 수술'을 강제로 시행한다고 발표한다.

소설의 마지막, D-503은 체포되어 강제로 '대전환 수술'을 받는다. 수술 후 그의 일기는 다시 차갑고 논리적인 문체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이 배신했던 I-330이 고문당하고 처형되는 모습을 아무런 감정 없이 지켜보며, "이성은 승리해야만 한다"는 말로 자신의 기록을 끝맺는다.

감상평

'우리들'은 현대 디스토피아 소설의 모든 핵심 요소를 최초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전지전능한 통제 국가, 개인성의 말살, 감시 사회, 성(性)의 통제, 이성과 감정의 대립 등, 오웰과 헉슬리가 발전시킨 수많은 주제들이 이미 자먀찐의 이 소설 속에 씨앗처럼 담겨 있다. '우리들'을 읽는 것은 디스토피아 장르의 뿌리를 탐사하는 경험과도 같다.

이 작품의 중심 갈등은 '나(I)'와 '우리(We)' 사이의 투쟁이다. 단일 국가는 집단의 행복이라는 절대 선(善)을 위해 개인의 자유, 개성, 상상력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믿는다. D-503의 비극적인 여정은, 가장 완벽하게 통제되고 길들여진 정신 속에서도 '나'라는 자아, 즉 영혼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은 '이성의 폭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단일 국가는 잔인한 폭력보다는 완벽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한다. 행복은 수학 공식처럼 계산될 수 있으며, 불행의 근원인 자유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섬뜩할 정도로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공학자 출신이었던 자먀찐은, 인간을 순수한 수학적, 공리주의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세계관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사랑, 꿈, 예술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임을 역설한다.

'자유와 행복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은혜로운 분'의 선언은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자유'와, 모든 선택이 배제된 보장된 '행복'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인간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우리들'은 20세기 초 전체주의 이념의 대두를 예언하고 그 위험성을 고발한, 놀라운 선견지명을 지닌 작품이다. 자먀찐의 수정처럼 차갑고 수학적인 문체는 그가 창조한 세계의 비정한 논리를 완벽하게 구현하며, 주인공의 감정적 각성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을 넘어, 집단적 행복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모든 시도에 대한 영원하고도 서늘한 경고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