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밀러에게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안겨준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희곡 중 하나로 꼽히는, 한 평범한 남자의 비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60대의 늙은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평생을 바쳐 좇았던 '미국의 꿈'의 허상 앞에서 좌절하고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통해, 이 작품은 성공 신화의 이면에 감춰진 개인의 고통과 소외를 심도 있게 그려냅니다. 작가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따라 현실과 과거, 환상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혁신적인 극작술을 통해, 한 남자의 심리적 붕괴 과정을 생생하고도 가슴 아프게 전달합니다.
등장인물
- 윌리 로먼 (Willy Loman): 이 희곡의 비극적 주인공. 63세의 외판사원으로, 수십 년간 세일즈에 몸바쳤지만 이제는 지치고 실적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인기와 인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미국의 꿈'을 맹신하며,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과 과장된 환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의 비극은 사회가 강요하는 성공의 신화에 의해 파멸에 이르는 '평범한 사람(common man)'의 비극입니다.
- 린다 로먼 (Linda Loman): 윌리의 아내. 남편의 실패와 정신적 쇠락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를 깊이 사랑하며 아들들의 비난으로부터 남편을 감싸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윌리의 망상을 묵인하며 그의 삶을 지탱해주지만, 동시에 그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조력자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남편의 장례식에서 외치는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라는 대사는 극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 비프 로먼 (Biff Loman): 윌리의 큰아들. 고교 시절 촉망받는 미식축구 선수였으나, 현재는 34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과거에 목격한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허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는 고통스러운 투쟁을 상징합니다.
- 해피 로먼 (Happy Loman): 윌리의 작은아들. 형보다는 세속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형과 마찬가지로 공허하며 허풍과 여자를 밝히는 성향을 지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기기만적인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비극의 끝에서도 아버지의 헛된 꿈을 좇겠다고 맹세하는 인물입니다.
- 벤 아저씨 (Uncle Ben): 오래전에 죽은 윌리의 형. 그는 윌리의 기억과 환상 속에서만 등장합니다. 아프리카 밀림에 들어가 다이아몬드로 부자가 된 그는, 윌리가 동경하는 '일확천금' 식의 성공 신화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 찰리 (Charley): 윌리의 이웃이자 유일한 친구. 성공한 사업가인 그는 비현실적인 윌리를 안타까워하며 계속해서 일자리를 제안하고 돈을 빌려주는 등, 현실적이고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줄거리
이야기는 윌리 로먼의 생애 마지막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현재의 사건과, 그의 기억 속 과거의 장면들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출장길에서 지쳐 돌아온 늙은 세일즈맨 윌리는, 더 이상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있다. 아내 린다는 그의 잦은 교통사고가 사실은 자살 시도일지 모른다고 불안해한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두 아들, 비프와 해피에게 윌리는 마지막 희망을 건다. 특히 왕년의 미식축구 스타였던 큰아들 비프가 옛 상사를 찾아가 돈을 빌려 사업을 시작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극은 윌리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아들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던 젊은 시절의 희망찬 과거로 수시로 이동한다. 그러나 그 과거 속에는 '인기'만을 강조하는 그의 잘못된 교육 방식과, 보스턴 출장지에서의 외도라는 비극의 씨앗이 함께 담겨 있다.
현재 시점에서 모든 것은 무너져 내린다. 비프는 옛 상사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윌리는 회사에 찾아가 내근직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해고당한다. 그날 저녁, 식당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갈등이 폭발한다. 비프는 자신의 실패한 삶의 진실을 아버지에게 고백하려 하지만, 윌리는 현실을 외면한다. 이 과정에서 비프는 십 대 시절, 우연히 보스턴의 호텔에서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자신의 우상이 무너졌던 그날의 상처를 터뜨린다.
집으로 돌아온 후, 마지막 논쟁이 벌어진다. 비프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아버지는 결코 위대한 인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a dime a dozen)'일 뿐이라며, 제발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애원한다. 역설적이게도 윌리는 아들의 눈물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의 죽음으로 받게 될 2만 달러의 보험금이 비프를 위대하게 만들어 줄 마지막 기회라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최고의 '세일즈'가 될 것이라 믿으며, 밤중에 자동차를 몰고 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희곡은 윌리의 장례식 장면인 '진혼곡(Requiem)'으로 끝난다.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친구 찰리만이 참석했다. 해피는 아버지의 꿈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하고, 비프는 그 꿈이 허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린다 부인은 왜 그가 떠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린 이제 자유로워졌는데..."라며 무덤 앞에서 오열한다.
감상평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꿈'이라는 거대한 신화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이다. 이 작품이 고발하는 것은 인격이나 인기, 혹은 벤 아저씨처럼 단번에 성공하는 요행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왜곡된 성공 이데올로기다. 윌리 로먼은 이 신화의 희생자다. 그는 평생을 허황된 꿈을 좇으며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부정했고, 그 잘못된 가치관을 아들들에게 물려주었으며, 결국 그 꿈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작품의 심장은 윌리와 비프의 뒤틀린 부자 관계에 있다. 아들을 통해 자신의 실패한 삶을 보상받으려는 아버지의 절박한 욕망과, 아버지의 허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아들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은 강력한 비극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들의 갈등은 부모의 그릇된 환상이 어떻게 자식의 삶을 억압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보편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서 밀러는 이 작품을 통해 '평범한 사람의 비극'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윌리 로먼의 비극적 결함(fatal flaw)은 왕이나 영웅의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필사적으로 존엄성을 지키려는 그의 투쟁이 바로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린다의 대사는, 잊히고 실패한 모든 이들을 위한 작가의 변론이다.
결론적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 개인과 가족의 붕괴를 통해, 한 사회의 신화가 가진 어두운 이면을 남김없이 드러낸 걸작이다. 윌리 로먼의 비극은 성공이라는 잣대만이 유일한 가치인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미소와 구두닦이만으로 저 푸른 세상에 올라타 있는" 외판사원의 쓸쓸한 뒷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윌리 로먼'들을 돌아보게 하는 깊고 슬픈 울림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