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대표작 '설국(雪国)'은, 뚜렷한 사건이나 갈등 구조 없이 오직 감각과 분위기,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의 허무와 아름다움을 그려낸 한 편의 시(詩)와 같은 소설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전설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눈 덮인 온천 마을을 배경으로 도시의 유한계급 남자와 순수한 게이샤 사이에 벌어지는 덧없는 사랑을 그립니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하고 절제된 문체로 헛된 노력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순수한 열정을 불태우는 여인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며, 일본 문학의 미학적 정수를 보여줍니다.
등장인물
- 시마무라 (Shimamura): 도쿄에 처자식을 둔 무위도식하는 유한계급의 남자.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는 평론가지만, 실제 무용 공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삶에 대한 진정한 열정 없이, 모든 것을 관조적이고 심미적인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방관자입니다. 그는 '설국'으로의 여행을 통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지만, 결코 현실에 발을 붙이거나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는 근대 지식인의 공허함을 상징합니다.
- 고마코 (Komako): 눈의 고장 '설국'의 온천 게이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순수하고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여성입니다. 그녀는 읽은 책을 꼼꼼히 기록하고, 매일같이 샤미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합니다. 그녀는 시마무라를 향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 사랑이 보답받을 수 없는 '헛수고'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비극적 인물입니다.
- 요코 (Yoko): 시마무라가 기차 안에서 처음 마주치는 신비로운 소녀. 저녁 풍경이 비치는 기차 유리창 위로 그녀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장면은 소설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고마코의 삶과 미묘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녀는 고마코의 현실적인 생명력과 대비되는, 차갑고 투명하며 손에 닿지 않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줄거리
소설은 주인공 시마무라가 눈 덮인 온천 마을을 찾아 기차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차창에 비친 요코라는 소녀의 신비로운 모습에 매료된다. 시마무라의 방문 목적은 지난번 여행에서 만났던 게이샤 고마코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다.
이야기는 뚜렷한 줄거리 없이, 시마무라가 설국을 방문한 세 번의 여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매번의 방문에서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순수하고 강렬한 사랑, 그리고 그녀가 쏟는 모든 '헛된 노력'에 매혹되면서도, 끝내 그녀의 삶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고마코의 열정적인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며, 오히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요코에게 더욱 신비로운 끌림을 느낀다.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 세 사람의 관계는 미묘한 긴장감과 엇갈림 속에서 이어진다. 고마코의 사랑은 시마무라를 향하지만, 시마무라의 시선은 고마코를 통해 요코의 환영을 좇는다.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통해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벗어나려 하지만, 시마무라에게 그녀는 그저 여행지에서 만난 아름답고 슬픈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소설은 마을의 극장에서 불이 나는 갑작스럽고 강렬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극장의 2층에서 요코가 떨어지고, 고마코는 이성을 잃은 채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한다. 이 비극적인 광경을 올려다보던 시마무라는, 밤하늘의 은하수가 거대한 흐름으로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듯한 감각에 휩싸이며, 이 모든 사건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는 완전한 비현실감 속으로 빠져든다.
감상평
'설국'의 위대함은 서사보다는 '분위기'와 '감각'을 통해 인간 감정의 가장 섬세한 결을 포착하는 데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 즉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はれ)'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기차 창문에 비친 요코의 얼굴, 눈의 냉기와 대비되는 고마코의 붉은 뺨, 하얀 눈 위에 펼쳐지는 치지미 옷감의 선명한 색채 등, 소설 속 모든 이미지는 곧 사라질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애처롭고 서정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은 알지만, 삶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는 근대인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안티히어로다. 그는 고마코의 뜨거운 사랑을 예술 작품처럼 분석하고 감상할 뿐, 그녀를 한 명의 인격체로서 사랑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감정적 거리감은 결국 어떤 것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그의 영혼의 황량함을 드러낸다. 이는 삶과 분리된 지성, 혹은 예술이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또한 이 소설은 '여백의 미'를 통해 독자의 감성을 극대화한다. 작가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대신, 인물들의 대화 사이의 침묵, 생략된 사건들, 그리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독자는 이 비어있는 공간을 자신의 상상과 감정으로 채워 넣으며 작품에 더 깊이 참여하게 된다. 이는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명상적인 체험으로 만든다.
결론적으로 '설국'은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인간의 내면을 깊이 뒤흔드는 조용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통해, 예술과 삶, 현실과 환상 사이의 비극적인 거리를 탐구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눈 덮인 온천 마을의 차가운 공기와 고마코의 뜨거운 열정이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오랫동안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긴다.